[영화]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스포일러 주의하세요!)

나는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보겠다 보겠다 벼르던 영화들 - 추격자라던가, 아들이라던가, 그 외에도 다수 - 을 영화관에 가서 본 적은 손에 꼽는다. 같이 갈 사람 구하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도 있지만, 두 시간이 넘어가는 러닝타임동안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화면에 집중하는 게 꽤나 어렵기 때문이다. 책은 읽으면서 음악을 듣는다던가의, 다른 일도 할 수 있지만 영화는 말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봐야 하는 것이니.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의 포스터를 처음 본 것은 집 근처 - 걸어서 15분 정도 - 영화관에서였다. 정우성과 이병헌이 멋진 자세로 총을 잡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송강호가 특유의 웃음을 지으면서 쌍권총을 들고 있는 포스터. 현재 상영하는 영화도 아닌데 떠억하니 영화관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포스터 - 현수막이라는 편이 옳겠다 - 를 보면서, 대체 저 영화가 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장총에 권총, 거기다 정우성이 쓰고 있는 모자를 보면 무언가 서부극 느낌도 나는데 송강호 모습만 보면 서부극도 아닌 듯 싶고. 학교를 왔다갔다 하는 길, 늘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보게 되는 그 포스터는 그냥 풍경의 하나였다.

그러다 시사회가 시작되고, 여러가지 평이 나오는 걸 읽어보면서 '이거 한번 봐야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호평도, 별로였다는 평도 있었지만 수많은 의견의 교차점이 하나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없던 영화". 꼭 봐야겠다는 생각에, 동생을 꼬셨다. 정말 재밌다니까 보러 가자고. 물론 내 말보다는, 이병헌이 아이라인 그리고 나온 포스터의 힘이 더 강했다 -_-;;


<놈놈놈>은....말 그대로, "지금까지 이런 영화는 없었다."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든 아니든, 저 말 하나에는 공감할 것이다. 서부극 분위기를 내는 한국 영화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그 배경이 1930년대 만주라는 것에는 더 놀랐다. 그런데 말이 된다.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지, 당시의 만주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러시아인, 그리고 기타 등등이 섞인 정신없는 곳이었을 테니까. 정우성의 정통 서부극 영웅 스타일의 간지나는 코트도, 이병헌의 잘 빠진 블랙 수트도, 그리고 송강호의 국적을 알 수 없는 솜옷과 고글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있었을 법 하거든, 단지 생각을 못 했을 뿐이지.

이 영화에는 잘 짜여진 구성이라든가, 철학적 주제라든가, 이런 것은 없다. 이야기도 대충대충 건너뛰고 빼먹으면 앞뒤 내용이 전혀 안 맞을 것 같은 장면들만 이어 놓았다. 중간중간 마적들도 몇몇 패가 나오고, 총쏘는 엑스트라들도 꽤 많이 나오는데 사실 이놈들이 뭐하는지 몰라도 전혀 상관 없다. 이름? 관계? 몰라도 상관 없다. 주인공 이름 정도는 헷갈리지 않게 외워주면 좋겠지만 사실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그놈의 '지도'가 나오지만. 지도가 대체 무슨 지도인지(초반에 어느 정도는 눈치채게 해주고, 나중에도 나오지만) 알 필요도 없다. 사실 그 지도를 쫓는 일본군도 그 지도가 뭔지 모른다. 가라니까 갈 뿐이지 ㅡㅡ;;
주제도 마찬가지. 독립군도 나오고, 일본군도 나오지만 독립운동이나 민족주의는 단 1g도 없다. 마적패 중 하나인 삼국파의 부두목과 윤태구 사이에 과거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알 필요 없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필요없는' 내용은 다 잘라 버린다. 필요한 것도 추리고 추려서 말만 이어지게 해 둔다.

주인공도, 좋은놈 박도원(정우성), 나쁜놈 박창이(이병헌), 이상한 놈 윤태구(송강호)라고 해 놓기는 했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누가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이상한 놈인지 알 수가 없다. 다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 이상한 놈이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명색이 좋은 놈인 박도원은 나쁜 놈, 그것도 현상금 많이 걸린 놈을 잡는 현상금 사냥꾼이고, 명색이 나쁜 놈인 박창이는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만 하는 삐돌이 두목이고, 이상한 놈인 윤태구는 웃기다. 나름 실력도 있고 머리도 굴러가는 것 같기는 한데 엑스트라도 멋진 권총 쏘는 것도 그냥 웃기다. 남들은 멋지게 폼잡는데 혼자만 어쩜 저렇게 웃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 초반에는 어느 정도 웃긴 행동을 하는 걸 보고 웃었지만, 나중에는 윤태구 그림자만 나와도 웃음이 터졌다 -_-;; )


나는 이 감독이 어떤 의도로 영화를 만들었는지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냥 '보고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면, 이 감독은 천재적이다. <놈놈놈>은 보면서 반전을 기대하거나 영화 끝나고도 격렬하게 토론을 벌여야 한다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보고 즐기면 끝이다. 박도원이 멋지게 밧줄 잡고 날아다니면서 총쏘는 걸 보고 감탄하고, 박창이의 잘 빠진 근육질 몸매에 (기쁨의) 비명 한번 질러 주고, 윤태구가 잠수정 헬멧쓰고 총 피하는 거 보면서 배 잡고 웃어주면 된다. 뒤에 숨겨진 내용이 있을 거라고 캐지 말자. 처음부터 밑도 끝도 없이 시작하고 끝나는데 뭐하러 머리아프게 내용을 캐나? 그 드넓은 만주 벌판에 저런 놈 몇몇 정도는 있을 법도 하고, 저런 일도 몇 번은 벌어졌을지도 모르잖나.

영화는 엔터테인먼트다. 말 그대로 보고 즐기는 거다. 김지운 감독은 그 점을 너무나도 잘 파악했다. 철학적 주제를 담은 영화, 사회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해 주는 영화, 그래, 다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더운 여름날, 안 그래도 불쾌지수 올라가는데 괜히 복잡한 내용으로 머리에 열 올릴 필요가 있나? 그냥 한바탕 웃고 스트레스 날려 보자. 개운한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서는 자신을 발견할테니.


덧. 정우성 기럭지 좀 짱인듯? 남들 다 앉아서 타는 말 혼자 서서 타고, 장총도 괜히 한바퀴씩 돌려가며 겁나 멋지게 쏴주시고, 밧줄 잡고 날라다니는데 비명이 절로 난다. 사실 대사 비중 제일 적고, 하는 일도 거의 없지만 정우성은 주인공 중 한 명임에는 틀림없다. 멋지니까. 더 말이 필요한가? 하는 행동 표정 하나하나가 화보인데 그냥 그거 보고 꺄악 해 주면 되는 거지.

덧 2. 이병헌의 박창이 캐릭터는 완전 '어린애'. 뭐든지 지 멋대로 지 기분대로 한다. 잘 봐주면 나르시즘이지만 내가 보기엔 어린애의 유치함이다. 가장 대표적인게 김판주 죽이고 혼자 뭐가 좋다고 -_-;; 세레나데 틀어놓고 혼자 춤추는 장면. 캐릭터의 특성을 가장 잘 잡아낸 장면이 아닐까 싶다. 몸매는 멋졌고 아이라인 그려서 강조해 주신 눈매는 섹시했지만 안타깝게도 기럭지가...OTL
근데 박창이 수트 대체 뭘로 만든거야? ㅡㅡ; 추격씬에서 그 많은 먼지를 뒤집어써도 왜 까맣고 윤기가 나는 건데?? 물론 나중에야 먼지 좀 묻지만 그 동안 뒹군거 생각하면 완전 새하얗게 되야 되는데???

덧 3. 배우는 역시 연기력. 저렇게 잘난 두 놈 사이에서도 절대 죽지 않는 송강호 당신은 역시 연기의 지존급. 근데 나중엔 정말 그림자만 봐도 웃겨서 미치는 줄 알았다 ㅠㅠ 남들 다 간지나게 말타는데 혼자 오토바이, 그것도 사이드카 달린 거 타고 달리고, 피튀기는 총격전도 송강호가 나오는 순간 코믹이 된다. 본인이 저 상황이라면 무서울 것 같은데 정작 밖에서 보는 관객은 즐겁기만 했다.

덧 4. 정우성과 이병헌은 굳이 찾자면 대역을 찾을 수 있을 법도 한데 - 물론 영화 보고 온 지금은 누구를 찾을 수 있을까 싶지만 - 송강호는 정말 대역 불가. 류승범 정도면 가능할까 생각해 봤는데 송강호 특유의 무게감이랄까, 그런 게 아직 부족해서 어려울 듯 싶다. 배우는 역시 내공인가...

by 지소낭자 | 2008/07/22 09:50 | 미디어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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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어흥 at 2008/07/22 12:58
넘 길어요 ㅠ.ㅠ
귀찮아서 덧글만 보고 리플 다는중;;;
Commented by 지소낭자 at 2008/07/23 11:25
/어흥 우아아앙 ㅠㅠ 열심히 쓴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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