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05 - 조용한 실험실

1. 어제 집에 오자마자 씻고 포도 한 송이 먹고 잤는데(12시 경) 일어나 보니 아침 8시 반(....) 공부해야되는 대학원생이 뭔 짓이냐! 하는 사람에게는 실험실 체험 12시간 코스를 추천한다. 수업듣고 쥐장가고 각종 시약과 씨름하다보면 밤 9시만 되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신발이 안 들어갈 정도로). 물론 잠은 좀 줄여야겠다. 놀 시간이 없으니.


2. 아침먹고 가방메고 나서니 아버지께서 "무슨 토요일에 학교를 가냐?" 라고 반문하신다. 지난 20여년 간 나는 대학생과 대학 교수는 무조건 토/일요일은 쉬는 줄 알았고, 가끔 뭔가 할 일이 있을때나 간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일요일이나마 쉬게 해 주는게 감사할 지경이다. 날 집에 보내줘, 우어어어.....


3. 분명 교수님은 '월~토 출근은 9시 반까지!' 라는 규칙을 내거셨는데 허둥지둥 실험실에 와 보니 선배 한 명만 와서 쥐 수술중이었다. 그러고보니 교수님도 안 나오셨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라, 라고 명령하고 그것이 지켜지길 원한다면, 특히 그게 규칙이라면 필수사항은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그 전에 우리 학교 대학원생들에게 9시 반 출근은 무리라는 감이 있지만.


4. 점심 먹으러 나갔다가 '현 카이스트 학생들의 문제점'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기숙사/이공계라는 특성 때문인지 몰라도 자기 관리가 지나치게 느슨하고 대인 관계에 서투르며 스스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 등등.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갔지만 다들 공감한 결론은 '학교 옆에 여대가 들어와야 한다!'. 남자들은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좀 상태가 나아질테고, 여학생들은 경쟁 의식이 생겨서라도 나아질테니.

그런데 남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여자에게 잘 보이는 것'이라니. 정말이지 남자란 슬픈 생물이다. 남자가 여자를 '선택' 한다고 착각하는 남자들이 있지만 진화적으로 볼 때 선택의 주도권은 항상 여성, female에게 있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쪽. 해마 같은 종류는 반대이다). 일부다처제도 좀더 우수한 유전자와 환경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여성이 높은 지위의 남성을 선택한 결과인 거고(물론 사회문화적 영향도 있지만). 사람들이 진화의 개념만 좀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 지금같은 우스꽝스러운 성차별/역차별 논쟁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결국 결론은 다윈은 정말 천재였다, 는 것(...)


5. 집에서 출퇴근하는 나를 보고 다들 왜 기숙사에 안 들어오냐 한다. 어떤 선배는 내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집에서, 특히 어머니에게서 독립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고. 하지만 난 마마걸이 아니다 -_-  단지 어머니와 사이가 특별한 것 뿐이지. 어머니를 좋아하고 같이 있고 싶지만 그렇다고 내 할일을 해달라 할 생각은 없다. 독립이란 건 단순히 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내가 부모님과 다른 개체라는 걸 깨닫는거다(부모도 마찬가지고). 그건 물리적 거리와는 관계없는 사항이고. 이역 만리 타국에 나가 있어도 시시콜콜 전화해서 돈 부족하다, 뭐 필요하다 소리를 하는게 독립은 아니잖은가.

....거기다 내가 모닝콜 서비스, 조식, 야식, 방 정리, 빨래, 청소, 출퇴근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숙소를 떠날 이유가 없잖은가(훗). 근데 이래서 독립하라는건가(...)

by 지소낭자 | 2009/09/05 13:15 | 일상잡상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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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그라드 at 2009/09/05 19:57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집은 독립하기 싫은 환경이긴 하죠 ㅋㅋ
Commented by Vampire at 2009/09/05 20:07
네.. 그래서 독립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
Commented by 우유균 at 2009/09/06 16:20
2년넘게 따로 살았으면서도 지금 이역만리에서 돈 부족하다, 뭐 필요하다 하며 갖가지것들을 리스트업 해서 보내는 나는 독립이 아닌게지...[...] 고생한다! 난 아직 정신이 하나도 없네. 다리 부을때는 자면서 베게 위에 발을 얹어두면 좀 덜해. 힘내잉
Commented by 테리 at 2009/09/07 05:24
1. 공감... 왠지 12시에 퇴근하면 억울해서 좀더 놀다보면 늦게자게 되지... 하지만 출근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ㅠㅠㅠ
2. 이것도... 연구실에 나와있는데 평일날 부모님이 계속 나오라고 부르면 대략 난감... 난 계속 안된다고 하고.... 왜 시간을 못내냐고 이해를 못하셔 ㅠㅠ
3. 원래 그렇지 뭐... 타의 모범이 되서 공감가게 할려면 관계가 수평적 관계여야지.. 예를 들어 한 반에 반장이 "우리 9시까지 등교하자." 라 하고 반장이 안지키면 욕먹는 건데, 교수님과 우리는 수직적 관계잖아. 오히려 회사에서 제일 환영 받지 못하는 상관중 하나가 일찍 나오는 상관이라 한걸 본적이 있어 ㅋ
4. 여.. 여대 도 좋지만... 현실적으로.... 종합대가 되는게.........(안생겨요ㅠㅠ)
5. 난.. 대학원 오면서 자금이 다 끊켰는데 ㅠㅠㅠㅠㅠㅠㅠ
Commented by 지소낭자 at 2009/09/07 09:22
/그라드 그렇죠(...) 공부 외에 골치아프고 시간 잡아먹는 일들이 죄다 해결되니 너무나 편해서 말입니다....

/vampire 제공되는 서비스는 써먹는게 인지상정이죠 ^-^ 그런데 독립해봤자 기숙사 아니면 자취방인데 솔직히 집이나 기숙사나 출퇴근 시간은 똑같거든요(...)

/우유균 독립은 자기가 돈 벌면 하는게다, 라는게 어머니의 말씀이시다. 너도 힘들텐데 화이팅이다! 몸 상태 잘 챙기고, 이쁘게 하고 다녀!

/테리 1. 시간이 새벽 5시 반...설마 밤샜니;;
2. 그런 면에선 우리 부모님은 좀 덜하신 편...일단 아버지도 공부하시는 입장이니까.
3. 하기사 교수님이 8시 출근 11시 퇴근 이러시면 학생들이 미치겠구나...ㄱ-
4. 종합대는 경쟁심리가 좀 덜 생기고, 옆에 여대가 생겨야 여학생들이 좀 정신을 차릴 듯.....남학생도 여대 쪽이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아? ㅋ
5. 난 아직까진...근데 곧 있으면 끊길 듯? =ㅅ=;;
Commented at 2009/09/07 19: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지소낭자 at 2009/09/07 21:35
/비공개 오 반갑다! 이글루스 하는구나!
처음엔 블로그 보고 안부나 남길까 해서 들어갔는데 읽다보니 진지해졌네 ㅋ
위에 있는 댓글들은...한명은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누군지 금방 감이 올 듯~?
대전 오면 한번 보자! 그때까지 일 잘하고 종종 들러~
Commented at 2009/09/08 20:0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지소낭자 at 2009/09/09 12:30
/비공개 저도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고, 집이 하숙집처럼(=밥먹고 자고 씻는 곳) 된 건 사실 중학생때부터지만; 그래도 집에 있다는 게 좋더군요. 처음엔 기숙사 생활이 배어서 부모님과 자주 충돌했지만 지금은 그때 집에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많이 들어요 ^^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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